빅 픽처 (원제 : THE BIG PICTURE)

종종 서점에 들러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보면 늘 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어떤 소설이길래 꽤 오래 저 자리를 지킬까 궁금했었는데, 막상 손에 잡고 읽어보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이 신분 세탁을 한 후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묘사한 작가는 그런 살인자를 응원하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난 그런 주인공을 응원했고, 정체가 탄로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간직한 채로 끝까지 읽었다. 다행히 걱정은 기우였고, 작은 안도감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옮긴 이의 글을 보니 독자들은 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심리상태를 겪었을 거라고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살인에 대한 거부감과 살인자에 대한 응원이 교차 공존하는 내 마음이 낯설었었는데, 대부분 비슷한 감정이었을 거로 생각하니 역시 난 보통 독자.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응원하도록 한 것은 작가의 힘이겠지.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닌 듯싶다.

벤은 어린 시절부터 카메라와 사진을 좋아했다. 외할아버지는 그런 벤의 꿈을 공유했고 후원해 주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정반대였다. ‘돈이 곧 자유’라는 생각을 하는 아버지는 결국 벤을 변호사의 길에 들어서게 한다.

현재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으며, 괜찮은 법률회사의 변호사다. 직장과 가족이란 외형만 놓고 보면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변호사 생활은 따분하기 그지없고, 아내와의 관계는 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카메라와 사진을 취미로 버텨내고 있으며, 여러 스트레스는 운동으로 달래면서 현재를 근근이 유지할 뿐이었다.

그런 그를 폭발하게 한 것은 이웃에 사는 게리와 아내의 불륜이었다. 게리는 부모의 유산으로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곧 유명 사진가가 될 것처럼 떠벌리는 허풍쟁이로 평소 경멸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아내의 불륜 상대라는 사실과 게리의 도발이 겹쳐 벤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이내 변호사로서의 이성을 되찾은 그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통해 자신을 자살로 위장하고, 다른 도시로 이주하여 게리로 살아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사고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매스컴을 타면서 게리(벤)은 그토록 원하던 사진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명성은 다시금 과거의 인물들을 불러들이는 씨앗이 되고 만다. 게다가 그의 정체를 눈치챈 퇴물기자 루디의 협박으로 게리(벤)은 점점 더 궁지로 몰려갔다. 그러나 루디의 죽음과 그의 죽음이 게리(벤)의 죽음으로 오인되면서 게리는 다시금 세 번째 인생을 살아갈 행운을 잡는다.

두번째 인생에서 만난 연인 앤과 함께 시작한 세번째 인생의 이름은 타벨이었다. 타벨(벤)은 앤과 아들을 하나 두었으며, 사진가로서의 재능을 다시 꽃피우지는 못했지만, 결혼생활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가끔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는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현실이었다. 이제 어디를 가더라도 그 길의 종착지는 집 외에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책 표지! 소설을 읽기 전에는 책 표지의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별생각이 없었고, 이북으로 본 탓에 다시 볼 일이 없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다시 보게 되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주인공 벤의 모습을 한 장의 그림으로 완벽하게 묘사했구나. 이미지 하나로 벤의 인생을 함축한 궁극의 경지를 보여준 또 하나의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메모

p 328

루디가 일하는 모습을 보는 동안 기자는 청소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장면의 세세한 부분들을 모은다. 그 세세한 것들이 한데 모이면 ‘큰 그림’이 완성된다. 사진가는 늘 상황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확실한 영상 하나를 원하지만 작가는 작은 일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세밀한 묘사가 없는 이야기는 맥없고 심심할 수밖에 없으니 좋은 글을 쓰려면 균형감을 유지해야 한다. 글 전반에 작가 자신의 시각이 담기지 않으면 독자는 작가가 관찰한 바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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