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출퇴근길엔 파올로 우첼로의 ‘산로마노의 전투(The Battle of San Romano)’에 관한 다큐를 보았다. ‘산로마노의 전투’란 그림을 매개로 당시의 사회와 그림의 가치,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잔잔히 풀어주는 덕에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우첼로는 15세기에 활동하며 ‘산로마노의 전투’라는 연작 3점 등을 만든 작가다. 당시 피렌체의 부호 중에 리오나르도 가문이 있었는데, 전통적인 것 보다는 새로운 시도를 더 좋아했나 보다. 우첼로의 그림이 당시로서는 실험적 기법인 원근법의 도입 등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는데, 리오나르도는 그의 그림을 좋아하여 여러 방법으로 후원을 했다고 한다. ‘산로마노의 전투’ 3점 또한 리오나르도의 침실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15세기의 이탈리아에서는 도시들 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많았다. ‘산로마노의 전투’는 이탈리아 피렌체 근방에서 피렌체의 용병과 시에나의 용병 1만 2천여명이 벌인 전투의 아침, 점심, 저녁나절을 그린 그림이다. 당시의 도시들은 직접 군역에 종사하는 대신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치뤘는데, 피렌체의 부호였던 리오나르도는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싶었다고 한다.
우첼로의 대표작인 ‘산로마노의 전투’는 3센티미터 두께의 백양나무판에 그려진 그림이다. 그림에는 원근법이 적용되어 거리에 따라 대상의 크기가 다르다. 지금이야 쉬운 개념이지만, 당시 우첼로는 원근법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많은 화가들이 원근법에 몰두했으며, 이미지가 분명한 그림들이 유행한 시기였다.
현재 남아있는 ‘산로마노의 전투’는 사각형의 액자모양이지만, 미술 전문가들은 상단에 아치 형태의 하늘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현재의 그림은 어두운 느낌이 강하며, 그림의 구도상 불완전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 미술 복원가가 우첼로의 화법을 이용하여 사라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을 복원한 그림을 보면 미술전문가들의 추측에 무게 중심이 더욱 실린다고 한다.
리오나르도는 침실의 세벽면을 ‘산로마노의 전투’ 3점으로 장식하고, 온전한 감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세 작품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사라졌다. 리오나르도의 사후 두 아들에게 상속되었지만, 이내 메디치에게 그림을 강탈당했기 때문이다.
리오나르도의 유언장 작성에 참여했던 메디치는 그림의 존재를 알게되었고, 후에 그 아들들에게 그림을 요구한다. 상속을 받았던 두명의 아들 중 한명은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요구를 수락한다. 메디치는 다른 아들에게 1.5점의 소유권을 요구하며, 압박한다. 당시의 메디치는 지금으로 치면 마피아 대부와 견줄 수 있었다고 하는데, 리오나르도의 아들 또한 만만치 않았나 보다. 결국 메디치는 리오나르도의 아들이 집을 비운 사이 사람들을 보내 그림을 강탈했다고 한다. 강탈만 했으면 좋았을 것을, 메디치는 그림의 위 부분을 잘라내어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림의 원형은 리오나르도의 침실 벽 상단의 아치 모양까지 품는 형태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후에 리오나르도의 아들은 그림을 찾기 위해 법적 소송을 벌였고, 재판에서 승소했지만 그림을 되찾아 오진 못했다고 한다.
이 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은 ‘산로마노의 전투’ 세 작품은 뿔뿔이 흩어진다. 한 작품만 이탈리아에 남아있고, 나머지 두 작품은 각각 영국과 프랑스에 보관되고 있다. 결국 세 작품을 모두 감상하려면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를 모두 다녀야 하므로, 돈 좀 있어야겠다. 문화유산, 그것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화유산의 힘이 느껴진다.
아, 그러고 보니 영국에선 이 작품이 처음부터 인정을 받았던건 아니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평론가들은 이 작품에 별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전시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20세기 초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부에서 전쟁에 관한 작품을 장려하였고, 그로 인해 인정을 받게된 작가들의 작품이 우첼로의 ‘산로마노의 전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알려지면서 재조명을 받아 오늘의 지위에 이르게 되었다.
배경지식을 가지고 그림을 다시 보니, 생명력이 느껴진다. 당시 리오나르도가 느꼈을 감동이 어땠을 지 상상이 된다.